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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

개구리는 개구리밥을 먹지 않고

키위새를 가른 들 키위를 얻을 수 없다
 
 
 
 
 
 
 
 
 
 
 
 
이츠키는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탁자에 놓인 차는 누가 내려준 것이더라. 뿌연 기억을 더듬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맛을 느끼기도 전에 입술에 닿은 차는 시릴 만큼 차가웠다. 한 모금 작게 홀짝였지만 남는 것은 떫은 끝맛뿐. 입안 잔뜩 밴 불쾌함을 떨쳐내고자 그는 냉수로 입을 헹궜다. 
 
똑똑똑.
 
이츠키가 물컵을 두 번째로 가득 채웠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인가. 슬슬 기도가 끝나셨을 시간인가. 시계를 힐끔 보았다. 짧은바늘이 5와 6 사이, 긴 바늘이 9와 10 사이를 향해 있었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그는 문득 시간을 어떻게 읽더라. 하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저녁 시간 즈음이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으나 무언갈 먹고 싶었다. 속이 텅 비어 어떻게든 채워야 했다. 그 공허함이 위장에서 오는 것인지 심장에서 오는 것인지 이츠키는 분간할 수 없었다.
 
똑똑똑똑똑.
 
어머니, 들어오세요— 이상했다.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들어오시지 못할 리가 없는데. 비밀번호를 잊으셨나? 집안의 나른한 공기에 취해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뗐다. 문 너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 이츠키. 문 좀 열어보렴."
 
우뚝.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갑자기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붉은 노을은 어디로 갔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뱃속이 울렁거리는 소리가 밖에서도 똑같이 났다. 온몸을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으며 이츠키의 머릿속에서도 번개가 두어 개 내리쳤다. 아무래도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하루종일 비나 맞으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젖어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있었으면. 아니, 차라리 지금 당장 뒤를 돌아서 멀리 떠나버렸으면. 그리하여 나중에 나 스스로가 이 순간을 회상할 때 '네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면 문을 열어봤을지도 모르는데.'와 같은 변명을 할 여지를 남겨주었으면. 그러나 그녀는 기어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어둠 속을 살펴보는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츠키는 걷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삐리릭—하는 소리와 함께 결국 열심히 그어둔 선이 지워졌다. 그의 손으로 직접 뭉개버렸다.
 
히로키의 얼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헝클어지게 두지 않던 땋은 머리는 제대로 묶인 쪽이 없었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누군가에게 얻어터졌는지 왼쪽이 팅팅 부어 있었다. 몸 여기저기 긁히거나 쓸린 자국이 많았고, 손가락은 몇 개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녹색 눈동자가 탁한 빛을 띠는 걸 보며 이츠키는 웃을지 울지 고민하는 사람처럼 애매한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나. 죽어도 자존심 하나는 지킬 것 같았던 네가 이런 추레한 꼴로 또 이 집을 찾아올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잔뜩 다쳐서…. 그녀의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이상한 박자로 똑— 똑— 떨어졌다. 그 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발밑에 만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로를 보며 서 있었다.
 
"…선배, 무슨 일이에요? 여긴 왜 찾아왔어요? 무슨 염치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비웃고자 했다. 제가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으니. 그러나 히로키는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츠키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숨통을 틔우듯 절박한 몸짓이었다. 
 
"나, 나…. 사, 사람을 죽인 것 같, 같아. 아, 아니 죽였, 죽였어."
"…뭐?"
"제발, 제발 이츠, 이츠키. 나, 나 여기밖에 가, 갈 곳이 없었어. 네가 싫어, 싫어할 거라는 거 내, 내가 제일 잘 아, 아는데…."
"…."
"나 좀 도, 도와ㅈ— 하, 한 번만. 응?"
 
잔뜩 겁을 먹은 소동물의 꼴. 그러나 왈칵 겁이 든 것은 이츠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들을세라 황급히 문을 닫고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수건을 내어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방금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 맞은편에 앉으라고 말했다. 히로키는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비를 맞아 추워서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질려서인지 그녀는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이츠키는 주전자에 있던 차를 데워서 그녀에게 건넸다. 기억나지? 전에 어머니가 따라준 싸구려 티백이야. 그렇게 비꼬고 싶었는데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는 건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머리로는 사실이 아닐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츠키는 살면서 언젠가 히로키가 누군갈 죽이게 된다면 그것이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히로키는 거짓말을 꾸며낼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이츠키의 머릿속에 그녀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태산만큼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정보를 그가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도대체 누굴 죽였다는 거예요?"
 
움찔,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히로키가 동요했다. 고개를 푹 숙이더니 모기만큼 작은 목소리로 담배를 한 대만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하려다가 사람이 죽었다는데 담배가 대수일까 싶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손에 힘이 빠졌는지 불을 켜는 것도 한참 걸렸다. 앞에서 사람이 그렇게 답답하게 굴고 있으면 한 번쯤 도와줄 만도 한데 이츠키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담배에 불을 붙인 히로키가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폐 안쪽이 니코틴과 타르로 가득 차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건강은 아예 망치려고 작정한 건가.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며 이츠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도박을 즐기는 그가 하기에는 영 부적절한 오지랖이었다.
 
"나, 나는 지오, 지옥에 갈 거란다, 이츠키. 내 소, 손으로 가족을 죽이다니. 이보다 더 크, 큰 죄는 없으, 을 거야."
 
아, 그 할매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죽었다니 어쩐지 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인자와 마주 앉아 있을 확률이 높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때의 가족일 확률은 더더욱.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그렇지만 완전히 정신이 나간 히로키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조, 좀 더 설명을 해 봐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제 보니 히로키의 손톱 끝부분과 팔뚝, 흰색 머리칼 이곳저곳과 입고 온 교복 사방에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그마저 빗물에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간 것이었다. 이츠키는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나 집에 있는 것 중 가장 커다란 담요를 두 장 가져왔다. 핏자국을 조금만 더 바라보았다간 자신 역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냥 덮으라며 히로키에게 담요를 내밀었지만, 삐져나온 부분에 묻은 피가 계속 눈에 거슬렸다.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옷소매 하나 보이지 않게 그녀를 꽁꽁 싸맸다. 마음만 같아서는 고기의 핏물을 빼듯이 히로키를 욕조에 담가 놓고 싶었다. 그 차가운 물이 그녀를 완전히 하얗게 되돌릴 때까지, 그녀의 죄악마저 색을 잃을 때까지.
 
"그, 그러니까 처음에, 에는 사소한 말, 다툼이었는데 자, 자꾸 참기 히, 힘든 부분을 건드려서…. 나도 어, 어쩌면 그만큼 상처, 상처 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는 누, 눈이 돌아버려서 그만,"
 
히로키의 동공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래도 어떻게 그, 그런 말을 해? 자기, 자기도 나만큼 힘들어했으, 했으면서. 다른 사람이, 이면 몰라도…. 그, 그래서…. 근처에 카, 칼이 있었는데. 왜냐, 왜냐하면 내가 키위를 까, 깎고 있었거든. 크기가 막 그, 그렇게 큰 것도 아니, 아니었단다. 그냥 딱 과, 과도였는데."
 
집안은 따뜻했다. 누가 언제 틀어뒀는지도 모를 히터로 인해 포근했다. 그러나 추위를 많이 타는 이츠키는 히로키에게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죽음의 온도에 손끝부터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주먹을 말아 쥐어 손가락을 전부 손바닥 아래로 밀어 넣었다. 마구 비벼 열을 내기도 해 봤다. 그렇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목을 쓸어내리다가 너무 차가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계절이 뭐였더라? 히로키의 교복은 분명 하복이니 여름일 텐데. 아아, 그럼 지금 이렇게 비가 오는 것도 장마라서 그런 건가? 근데 왜 이렇게 춥지?
 
"하, 한 번 찔러서는 죽지도 않, 않았단다. 내 히, 힘이 부족해서 칼날이 너, 너무 얕게 드, 들어갔어. 마구 나를 밀, 쳐내면서 저항했지. 부, 분명 내가 다, 다른 데도 더 찔렀던 것 같으, 같은데 잘 기억이 아, 안 나는구나."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절로 그 선혈 낭자한 풍경이 그려졌다. 비명소리와, 살이 찢기는 소리와, 넘어져 어딘가 부딪치는 소리와, 처절한 울부짖음이 가득했을 그 풍경이.
 
"정신을 차, 차려 보니 오히려 내가 주, 죽게 생겼더라. 어, 어느새 내 위에 올라타서는 멱, 멱살을 붙잡고 얼굴을 주먹, 으로 마구 패, 팼지. 터, 턱이 으스러지는 줄 아, 알았단다. 그래서 어떻게든 빠져, 빠져나가려고 손에 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그 사람 머리, 에 휘둘렀어."
 
뼈가 부러지는 소리, 둔탁한 것에 머리가 맞는 소리,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
 
"그, 그 사람이 힘없이 픽 쓰러, 쓰러졌단다. 나는 그, 무거운 몸, 몸뚱이를 간신히 밀어내고 그제, 그제서야 내가 소, 손에 들고 있던 걸 확인했어. 근데, 그, 그런데,"
 
이츠키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히로키가 왜 여기에 왔는지 원망스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참극을 제 집에서 재현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 두 사람은 절대로 함께 해서 좋은 꼴을 볼 수 없는데 도대체 저를 찾아와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아— 현실이 지독히도 끔찍했다. 차라리 너와 내가 가족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라도 엮인 적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너는 이런 날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텐데. 내 일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넌 왜 항상 이런 순간에만 날 찾는 거야, 왜…. 
 
"다, 다리미였어…. 키, 키위를 다 먹으면 빨래, 를 하고 다림질을 하, 하려고 하고 있었어서 여, 열이 끝까지 오른 다리, 다리미였다고. 아아…."
"그만."
"내 손도 화, 화상을 입어 화끈거렸지만 그, 그건 신경 쓸 일이 아니, 아니었어. 그 사람 머리에 움푹, 움푹하게 파인 자국이, 그, 그러니까 다리미의 뾰족한 끄, 끝이—"
"그만해요."
"저 멀리 내, 내팽개쳐진 다리미의 여, 열판에서 연기가 나는데,"
 
눈물이 질질 흐르던 히로키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무언갈 직감한 사람의 눈이었다.
 
"지, 집 안에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 않더구나."
"그만!!!"
 
이츠키가 귀를 틀어막았다. 가슴팍이 크게 널을 뛰었다. 무슨 감정인지 알지도 못한 채 울음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몇 마디만 더 해도 애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 것 같았다. 싫었다. 히로키 앞에서만큼은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만 제 앞의 이 여자가 낭떠러지로 저를 밀어붙였다. 손을 잡아줄 것도 아니면서.
 
"나가요, 선배."
"자, 잠깐만, 이츠키."
"씨발…. 여길 왜 온 거야.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선배도 알잖아요? 우리 집 쫄딱 망한 거. 어차피 선배 도와줄 여력도 없어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꺼져요."
"아, 아니야. 그런 도우, 도움을 생각하고 온 게 아니라고. 나, 난 그냥…."
 
아, 저 표정….
 
"난 그냥 이제 아무도 안 남아서…."
 
나랑 너무 닮아 있다.
 
"당장 나가."
 
의자에 자리를 내어주었던 것이 무색하게 이츠키는 히로키의 등을 마구잡이로 떠밀었다. 그 갑작스러운 태도변화에 놀란 히로키는 허겁지겁 일어나다가 책상다리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바닥에 잘못 찧었는지 왼손을 꽉 붙잡고 신음을 흘렸다. 검지와 중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분명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부러져있는 걸 봤었는데도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도와주면 안 돼. 걱정하는 티 내면 안 돼. 그랬다간 분명 발목을 붙잡히고 말 거야. 못 본 척해야….
 
"으으윽, 아, 흑…."
 
이츠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뭘 할 수 있지. 아파하고 있어. 어떡하면 좋아. 식은땀이 온몸에서 흘렀다. 저러다가 손가락을 못 쓰게 되면 어떡해? 내가, 내가 방금 밀어서 더 크게 다친 건가? 
 
내가 다쳤을 때는 어떻게 했더라?
 
–이츠키!
–조금만 참아, 집에 거의 다 왔어.
–울지 마…. 네가 우니까 나도 울 것 같잖아.
–내가 미안해. 널 데리고 거길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흑, 히끅!
 
어릴 적의 따뜻하고 작았던, 그렇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했던 누군가의 등이 떠오르는 바람에 이츠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내가 널 업는다 해도 돌아갈 집이 없어. 아무도 우릴 걱정하지 않아. 심지어 우리마저도…. 그는 어지럽게 널브러진 담요를 북 찢어 비틀어진 뼈를 둘둘 감았다. 거의 손 전체를 천으로 고정시켰을 무렵에는 히로키의 흐느낌도 잦아들었다. 그녀는 죽은 개구리의 눈으로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펄떡거릴 기운도 없이 죽음을 받아들인 내장에서 비린내가 났다. 이츠키는 언젠가 그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이유 없는 불안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을 누운 채로 가만히 있던 히로키가 입을 열었다. 
 
"나 지금도 나가야 되는 거니?"
"…."
"너는, 아니 나는…. 이츠키, 우리는 가족이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울컥했다.
 
"가족? 선배가 정말 내 도움을 원했으면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아무리 댈 핑곗거리가 없었대도 가족을 입에 올리면 안 되지!! 저는 어렸던 제 누이가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아예 다른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가족 같은 소리 집어치워요. 제발, 제발 내 추억을 그만 망쳐, 키유우나 히로키…."
 
오래 쌓아두다 못해 퀴퀴한 먼지까지 덮인 속마음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싸우고, 옛날 일들을 회상하고, 상처 입히다가— 끝내는 후회하는 거. 이츠키가 제 얼굴을 손으로 덮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래, 저도 마냥 그녀를 탓할 처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가 먼저 저질렀냐의 문제이지, 이츠키 역시도 언젠가는 가족을 죽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왔을 것이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 건 나였을지도. 혀끝이 따끔거렸다. 물러진 키위향이 났다.
 
"하, 씨발…. 이젠 알아서 해요."
"……."
"부모님은 이제 이 집에 안 와요. 그리고 전 선배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어차피 있었어도 도와줄 생각은 없었지만."
"어디 가시기라도 한 거니?"
"몰라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요."
"너도 혼자 남았구나."
"…그래서 좋아요? 그때처럼? 내가 선배랑 같은 처지가 됐으니까 기뻐 죽겠어요? 하하하, 저도 기뻐요, 선배. 그 인간한테 오래 시달려왔으니까 지금은 아주 속이 뻥 뚫리셨겠네. 첫 살인이자 복수를 아주 축하드려요. 이거면 돼요?"
"아니야. 아니란다, 이츠키."
 
쉬어버린 히로키의 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순간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비록 사랑받았던 것은 한때일지 몰라도 쉼 없이 그 애정 어린 눈빛을 되새김질하며 살았어. 가장 증오하던 순간에도 그랬어. 얼굴을 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데도 맛있는 붕어빵을 나눠 먹고 싶었어.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지워버리고 싶은 만큼 그 사람과의 행복한 미래를 그렸어."
"하, 하하. 고작 가족이라서요? 피가 이어져 있어서?"
 
그녀가 자세 그대로 고개만 저었다. 완강한 부정의 표현이었다.
 
"온 마음 다해 아꼈으니까. 껴안았을 때 가슴에 딱 맞게 들어가는 행복이었으니까. 맞잡았던 손의 온도가 좋았으니까.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으니까. 생일날에 초를 먼저 불어버렸으니까.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개구리를 함께 잡았으니까. 키위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같은 시간을 공유했으니까. 다음을 기약했으니까. 멍청한 울보였으니까. 몰래 뒤뜰에 나갔으니까. 잠이 오지 않을 때 함께 양을 셌으니까. 서로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주고받았으니까.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네가 불렀던 동요를 여전히 기억하니까. 각자의 삶에서 행복하자고 약속했으니까. 네가 어른이 되면 나보다 커질 거라고 장담했으니까. 지나가던 별똥별에게 너의 안부를 물었으니까. 다시 볼 때 네게 들려줄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싶었으니까. 네가 나를 누나라고 불렀으니까."
"잠깐만요, 선배 목에—"
"이츠키."
 
히로키의 목에 푸른빛의 멍자국이 생겨나는 게 보였다. 그것의 색은 시시각각 더 어두워졌고, 그에 대비되듯 히로키의 얼굴은 갈수록 차갑게 질려갔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이츠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그의 손에는 가녀린 목 한 줌이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이츠키의 손 모양을 따라 히로키의 피부에 새겨지고 있었다. 그는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때 히로키가 이츠키의 손을 잡아뗐다. 시계에서는 짧은바늘 두 개와 긴 바늘 다섯 개가 각각 다른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이츠키의 팔을 옆으로 치우더니 그를 아주 세게 꽉 끌어안았다. 시체 같은 몸뚱어리에도 사람의 체온이 있었다. 어릴 적 업혀 본 그 등의 따스함이었다.
 
"넌 날 죽일 필요 없어. 너의 복수는 이미 내 손으로 끝냈어."
"선배, 선배?"
"이츠키, 너의 앞길을 빌어준다는 말은 이제와선 의미가 없겠지. 그러니 나는 다만, 더 이상 네 걸림돌이 되지 않고자…."
 



 
 
"내 하나뿐인 동생, 사랑해!"
 
 
 
 
 
이츠키는 빈소의 벽 한쪽에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이 없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가 영정을 앞에 두고 꿈을 꿀 정도로 정신없이 잤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채 열 송이는 될까 말까 한 국화와 그 위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히로키를 바라봤다. 그녀가 숨을 거둔 지 29시간이 지나 있었다. 꼴랑 29시간이었다. 이츠키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아, 그녀가 죽였던 것은 할매가 아니라 나였구나….
죽음마저 거스르고 날 찾아온 나의 누이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나에 대한 증오심을 견디다 못해 죽여놓고, 그것을 고해성사하듯 내게 온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날 더는 아끼지 않는 척하더니. 왜 그렇게나 소중한 사람인 양 말한 거야. 가족이 뭐라고. 고작 그게 뭐라고….
 
바보 같은 이츠키. 그건 꿈이야. 이 세상에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히로키는 없어.
아니, 아니지. 이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히로키도 없어.
오늘로써 너의 동경은 박살 나버렸기에….
 
나는 네가 죽을 만큼 미웠지만
죽지는 않기를 바랐어.
 
"누나—"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구현되지 못하고 혀끝을 맴돌다 부서졌다.